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면 본의 아니게 관찰자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물끄러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으로 사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닫히는 지하철 문을 보고도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다가 가방이 문에 걸려 당황하는 사람도 있고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치고 갔음에도 사과 한마디 없이 멀뚱히 쳐다보고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하철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또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드넓은 세상에서 ‘내’가 기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다양성 속에 그저 나도 그 하나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인데 정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속에 있는 생각을 굳이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은 자신의 본 것에 하나하나 토를 달며 정죄하거나 비난하며 자신의 판단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누구도 관찰자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관찰되는 대상이 얼마든지 되기 때문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옆 사람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 그런 것이라 넘길 수 있지만 그만큼 우리를 대놓고 관찰하는 자들이 주변에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무례한 관찰이라도 순기능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은밀하고 음흉한 죄악들은 많아지겠지요.
역대상 28:9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감찰이라는 말은 ‘찾다, 탐구하다, 자주 드나들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 그분을 섬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에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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