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살면서 자살에 관해서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극단적인 삶의 포기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극단은 있었습니다.‘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간 때는 여러 번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졸음운전입니다. 중앙선 침범에 다리 난간 스치듯이 지나가기 등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드는 생각이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질기다고 흔히 말하지만 친한 친구들을 사고로, 혹은 병으로 먼저 보낸 경험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 진짜 별것 아니다.’삶의 현장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사고의 위험이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럼에도 둔해진 감각기관은 이런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 채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머리에 거품 가득 샴푸를 먼저 바르고 몸에 비누칠을 하는 중에 거품이 내려와 눈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따갑고 쓰린 눈에 샤워기로 물을 정신없이 뿌렸습니다. 순간 코와 입은 세찬 물줄기에 막혀버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런 고문이 계속 된다면, 이보다 더한 고문과 고통이 지속된다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머리를 스치고 심장을 걷어찼습니다. 자신이 사라지고 약함이 몰려왔습니다. 몇 해 전에 청년들과 방문했던 순교자기념관에서 보았던 고문의 현장들이 기억났습니다. 그 중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솔직한 기도부탁이 다시금 생각났습니다. 그는 마지막 설교의 제목을 ‘다섯 가지 종류의 기도’로 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짧은 고난은 내가 어쩌다 견딜 수가 있겠지만, 그 고난이 장기간이 되면 나도 주님을 부인할까 봐 두렵습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였습니다.
고문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삶은 고문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미얀마에서 만난 한 여인은 삶에 지쳐있었습니다. 많은 자녀와 언제나 부족한 살림살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남편 등등으로 인해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사는 것이 고되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는 짧은 기도와 말씀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고 손에 쥐어준 적은 돈에 눈물을 보이며 고마워했습니다. 한동안 힘을 내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고통은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실패의 아픔은 사는 날 동안 계속되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생 별것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생 속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의 삶을 조금 연장하게 하는 다른 차원의 고통이 아닙니다. 많은 고통이 따르는 중환자실에서 시행되는 생명연장 치료가 아닙니다. 은혜는 고통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소망하며 기도하는 자들을 함께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무기력한 위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으로의 인도입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