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시키는 것이 싫어서 그 일이 아무리 타당하고 옳아도 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숨은 객기가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공부를 그렇게 해보라고 하지만 둘 사이에는 전혀 다른 이질성이 있습니다. 전자는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시켜서 또는 어른들이 만들어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것처럼 보여 하기 싫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서, 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일에 매달리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 강권하거나 시켜서 하는 일에는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는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진리로 자유케 된 인생은 자유롭게 세상을 사는 것처럼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며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사랑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강권(强勸)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것만 자랑하고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죽은 사람 나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랑은 억지로 해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진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대가도 감히 지불할 수 있고 기꺼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얼마든지 명령하고 강제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키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사랑 안에서 강권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설복(說伏, persuasion)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자원하는 복종을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이 설복에 무너져서 지금도 주님의 일을,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그분의 사랑과 설복과 강권하심이 그 자리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지나간 이전의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살았고 자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실상은 죄를 위해 살고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건지셔서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권하심에 반응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우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강권하심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개인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는 이제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 이어져 우리로 하여금 있는 자리에서 화목하게 자로 서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강권하심도 사랑으로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순종 또한 사랑으로 화목의 직분도 사랑으로 하게 하셨습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공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분의 사랑에서 벗어나 스스로 감당하려는 삶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삶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너무나 평범한 이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삽니다. 능력을 쫓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이고 싶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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