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없이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가장 좋은 것을 주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아닌가. 이 은혜는 갚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는 것이다. 누림으로써 갚는 것이다'
- 박혜란의 '목사의 딸' 중에서, 241쪽
이 책의 부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아픔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이다. 전에 부교역자 시절 한 교회에 이력서를 넣었더니 면접서류가 도착했다. 지원자가 많아서 그랬는지 다양한 질문에 답을 적어서 다시 반송하는 형식이었다. 그때 문제 중에 하나가 교회와 가정 중에 어느 것이 우선순위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야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이런 것을 묻지. 단단히 각오해야겠다' 그리곤 교회라고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열심히 일할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
역시 부교역자 시절, 1년 6개월 이상을 쉬는 월요일 반납하고 열심히 사역을 배우러 다녔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야 들어왔다. 그 사이 셋째가 컸다. 돌아보면 가장 나를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나로 인해 그 아이는 언제나 방에서 콕 쳐박혀 있었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들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거창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자 했던 열심은 아니었다. 단순히 나의 목회발전을 위해서, 목회성공을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한 사역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사역이 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을 위해서 하는 열심이다.
열정과 비전 앞에 누림은 때로 한가하게 들리고 무기력한 변명처럼 들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감동하는 그날까지 앞만보고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달려야 할 사역의 길에서 혼자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내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성도들도 주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누림으로써 갚는다'는 말이 제일 좋다.
누릴 수 없는 시대, 누릴 것도 없는 세대를 산 아버지는 늘 새벽시장에 나가시는 것이 전부였다. 함께 했지만 함께하는 방법을 몰랐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분의 함께하심이 좋다. 오늘도 나는 더디지만 그분에게 함께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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