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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분한 의욕
배정환 2017-08-16 추천 1 댓글 0 조회 223

눈으로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여유가 생깁니다. 분노가 앞서는 순간에도 눈을 감고 성령의 다스림을 구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경험합니다.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전화로 통화하면 더 깊은 곳 감추어 놓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모처럼 집에서 쉬는 아빠는 늘 잔소리꾼이 되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을 때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하더니 막상 같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있다 보면 늘어나는 것은 잔소리뿐입니다. 이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숙제는 했느냐? 왜 TV만 보고 있느냐? 등등. 눈에 보이는 대로 투덜거리는 아빠는 아이들의 적이 되고 맙니다. 지켜보는 아내는 이렇게 말하기 마련입니다. ‘처음이 아니야. 매일 아이들이 그렇게 보내고 있어. 그래도 때가 되면 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

아내가 잠시 여행을 가거나 친정을 가게 되어 집이 비게 되었을 때 막내에게 전화가 옵니다. 형과 누가가 싸우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빠는 서둘러 집에 가면 안 됩니다. 매를 들고 심하게 혼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직장 동료와 밥도 먹고 늦게 선물을 사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훨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좋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심정도 이와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다시 은혜를 얻기 원했지만 성령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달랐습니다.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배력은 무엇보다 ‘내가 아니면 안 돼.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라는 생각의 지배에서 나옵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 속에 그 문제를 해결할 바로 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 사람은 분명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일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결정이 아닌 스스로 교만한 판단에 의해 자신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러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직접 보고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가 가면 해결의 의욕이 너무 앞서 사도권의 남용으로 그들을 지배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유로 그들을 대하지 못하고 분노로 깊은 상처를 주었을지 모릅니다. 이에 성령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바울에게 좋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오랜 세월 몸담았던 자들이 갖게 되는 착각은 내가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문제 앞에 우리는 이 사실을 늘 망각합니다. 해결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동료로서 형제로서 바울은 ‘형제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섭니다. 상담을 하는 중에도 같이 아파하기 보다는 정답을 제시하려는 못된 습관은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직업병임과 동시에 직분자의 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돕는 자는 원어적으로 동역자입니다. 형제의 기쁨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형제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는 자로서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은 형제를 향하여 마음과 눈이 자신도 모르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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