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오후, 스스로 장로라고 소개한 분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지방에 위치한 교회에서 열심히 장로로서 교회건축과 여러 사역을 감당하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장황하게 자랑을 곁들여 늘어놓았습니다. 묻지 않았지만 그는 대답했고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의 결국은 돈이었습니다. 1만원만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카드기로 현금인출을 하려는데 에러가 나서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도와주겠다’는 그의 말이 유독 그날따라 반갑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분명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준다는 말이 반가웠고 귓등으로 날아가지 않고 새가 둥지에 앉듯 귀에 속속 다가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천 원짜리 한두 장 있는 평소와 달리 지갑에 정말 드물게 1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내 것 인양 내 지갑에 있었지만 그 돈은 그의 것 이었는가 봅니다.
그는 교회를 나가면서 다음 주일에 오겠다고 했지만 기대는 이미 마음에서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홀린 듯 주어버린 돈이 아까웠습니다. 돈을 잃은 마음은 한참 쓰라렸습니다.‘도와주겠다’라는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쉽게 마음을 연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도와달라’는 그의 영혼의 음성을 듣지 못한 저의 영적 무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나그네 같은 그에게 너는 어떤 사랑으로 도와주었느냐?’며 물으셨습니다. 불쌍한 영혼에게 도와주기 보다는 도움받기를 원했고, 돈을 주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앞두고 있는 교회에 와서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운 그를 적당히 돈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혹시 모르는 염려의 폭풍은 잠재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통해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거의 확실하게 음란의 죄를 지은 성도를 적당하게 덮고자 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며 교회에서 치리로 다스릴 것을 가르칩니다. 이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를 치리하고 교회의 성결을 지켜냅니다. 하지만 그 성도를 사랑하지 포용하지는 못합니다. 치리자체가 사라진 현대교회에서 고린도교회는 분명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치리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마친 의사가 다시는 그 환자를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치리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보기에 흉측한 환부를 도려냈다면 다시 회복되도록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의사입니다. 죄를 도려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일에 게으르다면 분명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것은 속이는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영혼의 중병이었습니다. 영혼을 바라보지 못하는 목사는 눈 먼 목사입니다. 돈 1만원은 아깝게 생각했지만 그 귀한 구령(救靈)의 기회를 잃은 것에는 아까움이 없었던 저에게 성령은 눈을 떠라 하시는 듯 했습니다. 정죄와 판단의 능력은 날로 새로워지고 날카로워 지는데 사랑으로 품는 마음도 오히려 좁아지고 옹졸해지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주님! 더 큰 마음을 주소서. 눈을 열어 영혼을 보게 하소서. 어떤 기회도 복음 전파로 활용하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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