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주님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기준이 나였는데 이제 그 기준이 하나님이 될 때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른 것은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어른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아야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같은 것을 바라보아도 기준점이 다르면 다르게 보입니다. 휠체어를 타는 청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갈 때는 몰랐으나 장애물이 있어 무릎을 꿇고 형제의 기준점에서 바라보니 온통 장애물이었습니다. 계단을 물론 기울어진 경사면도 위험했습니다.
신앙은 주님 안에서 진리를 통해 얻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인데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각종 체면에 눌려 억지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믿음의 분량보다 과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시력검사를 할 때 눈이 나쁜 것을 감추고 싶어서 시력검사표를 다 외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가리키는 것마다 다 말하니 2.0에 가까운 시력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자랑했습니다. 시력검사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와도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시력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모방은 창조를 위한 과정입니다. 믿음 안에서 앞선 자를 모방하는 것은 배움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약하면서 강한 척하기 위해 흉내 내거나 신앙의 높은 경지에 이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믿음 안에서 약한 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위해 풍성한 자유를 절제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약한 자가 강한 척하기 위해 흉내 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흉내로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랍니다. 약한 믿음을 자랑할 것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은 자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약한 믿음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을 중단하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더 깊은 친밀함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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