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을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보다 더 애절한 기다림은 책망 후에 상대방의 반응입니다. 사랑으로 훈계하거나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어디로 뛸지 모르기에 조바심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훈계하기를 기뻐하는 부모라도 자식의 눈치를 보기 마련입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아버지의 훈계를 감내하지 못하고 자살한 자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책망을 듣는 자녀보다 책망을 하는 아비의 마음이 더 조심스럽고 아프다는 사실을 몰라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을 분명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훈계하시며 훈련하십니다. 자녀가 된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자녀답게 서도록 훈련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기에 따끔한 충고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치 아비가 자식에게 사랑의 충고를 아끼지 아니하듯 바울도 고린도교회를 자식으로 여기며 눈물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자 했던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의 작은 항구도시인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디도를 만나 소식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사역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자리는 가장 중요한 사역의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사역의 길을 열어주실 때 그때가 일할 때입니다.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깨어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는 때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디도를 만나지 못한 사도 바울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품고 한 교회를 품는다는 것은 이처럼 마음에 근심도 있습니다. 교회를 염려하고 영혼의 아픔을 근심하는 목회자, 성도가 아쉬운 때입니다. 근심하기 보다는 옮기려하고 염려하기 보다는 무관심하려는 태도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해야 할 근심과 감당해야 할 염려가 있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근심이 기도가 될 때 비로소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근심하기를 포기할 때 마음은 편해지지만 기도는 깊어지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을 수 없어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선교지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특유의 냄새와 향도 만나게 됩니다. 민족 특유의 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즐겨먹는 향신료가 있고 좋아하는 향이 있습니다. 태국선교에서 만난 팍치는 우리나라에서 고수로 불리는 것으로 먹기에도 힘들지만 먹고 나서 속에서 품어나는 향은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지 선교사님은 오히려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들의 향에 익숙하지 않으면 선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분을 알기에 그분을 닮은 말투, 행동, 사고 등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어떤 향기 혹은 냄새를 풍기는지 돌아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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