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서를 부탁받았는데 쓸 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처럼 난감한 일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경우 추천서의 내용은 선명하고 확신 가득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억지와 형식이 덕지덕지합니다. 부교역자 시절, 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추천서가 가장 고민이었습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또는 목회계획서는 나름 알아서 쓰겠는데 추천서는 스스로 쓸 수 없는 것이기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어렵게 부탁해서 받았다 할지라도 떨어지면 또 받아야 하기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어떤 경우 추천서를 재활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괜히 “내가 추천했는데도 떨어졌단 말이냐?”라는 불편함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내면에 다른 생각은 스스로가 추천을 구절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관계에서는 추천서는 무의미합니다. 상대방을 잘 알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분의 추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책의 내용은 좋은데 저자가 무명인 경우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름이 잘 알려진 분들의 이름이 추천자라는 명목으로 저자 밑에 함께 나란히 실리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저자의 이름보다 추천자의 이름이 더 크게 실려 있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저자의 경우 추천보다는 독자 리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도 합니다. 결국 신뢰의 문제입니다. 간단한 면접이나 서류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기에 추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추천자 역시 그 사람을 한쪽 면만을 보고 이런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이런 사람은 추천받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던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너무나 멋진 문장으로 추천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보는 각도가 다르고 기억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추천은 단지 참고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추천서가 요구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의 사도성을 의심하며 추천서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의 추천서라고 멋들어지게 답합니다. 사람만큼 확실한 추천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이것처럼 분명한 추천서는 없습니다. 담임목회자를 선별할 때 사역 중에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함께 면접할 수 있다면 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목회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절차의 어려움과 거짓말이라는 위험성은 있지만 사람이 추천서라는 사실은 더 분명해지리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살아있는 편지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통해 변화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통해 복음의 소식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이 계속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추천한 자들입니다. 세상 속에 침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예수의 영향력을 끼치라고 우리를 추천하여 보내주셨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이라 말씀합니다. 마음에 새겨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너무나 분명한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살아있는 편지로 누군가에게 보내질 것을 기대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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