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장을 읽다 보면 사도 요한이 가지는 성령에 대한 이해의 단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절). 성령이 사람의 심령에 거하기 보다 넓은 세상에 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봅니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행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보이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바꾸시고, 악하고 해로운 환경들을 변화시키고 궂은 날씨처럼 칙칙한 인생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눈부신 햇살이 빛나게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분명히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작고 작은 인간에 내면에 거하기를 더 기뻐하셨습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은 일시적이고 단회적이지만 사람의 내면이 바뀌고 그로 인해 사람의 행동이나 행함이 바뀌면 환경이나 여건은 달라지지 않아도 능히 대처하는 태도나 자세가 달라져 능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삶을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성령의 관심은 언제나 놓은 환경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는 성도의 내면입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은 쉬운 일을 마다하고 어려운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의 내면은 하나님의 재창조, 바로 그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였고(신 10:16).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9)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어떤 ‘환란이나 역경 또는 절망’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결코 주저 앉힘을 당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안에 또 다른 우주를 만드시는 것을 좋아하셨음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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