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교회에서 멀지 않는 도로에 무인 카페가 여럿 생겼습니다. 그중 한 곳에는 커피나 음료를 마시면서 자유롭게 가져다 먹을 수 있도록 비스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센스있는 서비스라 여기며 하나 혹은 둘 가져다가 커피를 마시며 나눠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쓴 커피와 달큰한 비스킷의 조화가 잘 어울렸습니다. 어느 날 청년들과 함께 작은 소그룹 모임을 그곳 무인카페에서 가졌는데 그 많던 비스킷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피와 먹기에 딱 좋은데 ‘조금 아쉽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골목에서 가끔 보았던 낯익은 한 분이 들어오더니 커피나 음료는 주문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비스킷이 담겨 있는 바구니 쪽으로 가더니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어보고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비스킷 바구니에 남은 것 하나 없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나갔습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이 맡겨 놓은 비스킷을 다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와 자기 편의주의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당찬 행동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행동에 당혹감을 가진 것은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골목에서 마주칠 때 그토록 크게 틀어놓고 듣던 설교는 다 어디로 갔나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은 죄성으로 가득찬 나를 깨고 허물어 생명을 공급하는 것인데(히 4:12), 자기 본위적인 신앙은 죄악된 본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자기로 충만하게 하며 자신의 기호에 맞는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나를 세웁니다. 나로 충만한 신앙을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고 그런 자의 삶을 보는 것보다 괴로운 것도 없습니다. 달콤한 비스킷이 때로는 에덴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처럼 보일 때도 있으니 깨어있음은 가끔이 아니라 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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